집 안에서 누군가가 소리 지르고, 물건이 부서지고, 누가 다치는 장면을 본 아이는 그날 이후로 같은 집에서 전혀 다른 세상을 살게 됩니다.
어른들은 “지나갔으니까 잊어버려.”라고 말하지만, 아이의 몸과 마음은 그렇게 쉽게 ‘원래대로’ 돌아가 주지 않습니다.
오늘은 가정 폭력을 경험한 아동의 심리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그리고 어른들은 무엇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지를
최신 연구와 실제 지원 원칙을 바탕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1. 가정 폭력을 본 아이에게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유니세프와 여러 연구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수억 명의 아이들이 가정·가족 내 폭력을 직접 당하거나 목격하고 있으며, 이는 우울, 불안, 공격성, 학습 저하, 대인관계 어려움 등 광범위한 영향을 미칩니다.
특히, “맞는 사람”만 피해자가 아닙니다.
폭력을 보는 것만으로도 아이에게는 ‘정서적 학대’에 가까운 충격이 됩니다.
주요 특징을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1) 늘 ‘긴장 모드’인 아이
폭력 상황을 반복해서 겪거나 목격한 아이들은
몸이 항상 “언제 또 무슨 일이 날지 몰라” 하는 상태로 살아갑니다.
- 작은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고
- 집에 들어가기 전, 부모 얼굴부터 살피고
- 밤에 쉽게 잠들지 못하거나 악몽을 꾸기도 합니다.
폭력 상황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아이는 스트레스 반응 시스템이 꺼지지 않고 계속 켜져 있어 만성적인 과각성 상태, 집중력 저하, 두통·복통 같은 신체 증상을 보일 수 있습니다.
2) “내가 잘못해서 그런 걸까?”라는 자기 비난
아이들은 세상을 자기 중심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집에서 싸움이 나면,
“내가 말을 안 들어서 그런가?”,
“내가 공부를 잘했으면 일이 이렇게까지 안 됐을까?” 라고 자기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자기 비난은 시간이 지나 성인이 된 후에도 낮은 자존감, 건강하지 않은 대인관계,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깊은 믿음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3) 어떤 아이는 더 공격적으로, 어떤 아이는 더 조용해집니다
- 어떤 아이는 친구를 때리거나, 욕을 하거나,
학교에서 문제 행동을 보이기도 합니다. - 또 다른 아이는 지나치게 조용해지고,
“괜찮아요.”만 반복하며 자기 감정을 숨깁니다.
두 모습 모두 “도와달라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가정 폭력에 노출된 아동은 외현화 문제(공격성, 반항)와 내재화 문제(불안, 우울)가 둘 다 증가할 위험이 높습니다.
4) 사랑과 폭력이 섞인 ‘혼란스러운 가족 이미지’
아이에게 가해자는 곧 엄마, 아빠, 보호자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머릿속에 이런 혼란이 생깁니다.
“나를 때리지만 그래도 날 사랑하는 걸까?”
“폭력을 참는 엄마(아빠)를 내가 지켜야 하나?”
이런 경험은
훗날 연애·결혼 관계에서
“폭력도 사랑의 일부”로 오해하거나,
건강하지 않은 관계를 끊지 못하게 만드는 세대 간 전승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도 있습니다.
2. 심리 지원의 첫 번째 원칙: ‘안전’과 ‘믿어주는 어른’
가정 폭력을 경험한 아이에게 심리적으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거창한 상담 기법보다
“나는 이제 안전한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믿어주는 어른이 있는가?”입니다.
1)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 주세요
- “그 일은 너 잘못이 아니야.”
- “그때 많이 무서웠겠다. 그렇게 느낀 게 너무 자연스러운 거야.”
- “네가 이야기해 줘서 고마워. 너는 혼자가 아니야.”
전문가들은 “도대체 왜 그랬어?” 같은 말 대신 “무슨 일이 있었니?”, “그때 어떤 기분이었어?”처럼 비난 없는 질문을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2) ‘지금 여기’의 안전감을 만들어 주기
- 폭력이 반복되는 환경이라면, 아이가 당장 물리적으로 안전한 장소에 있도록 돕는 것이 1순위입니다.
- 집 안에서 폭력이 재발할 위험이 크다면 혼자 해결하려고 하기보다,
112, 아동보호전문기관(1577-1391), 가정폭력 상담소, 여성긴급전화 1366 등 외부 기관의 도움을 반드시 요청해야 합니다.
아이의 심리 지원은 “위험에서 벗어나게 돕는 일”과 반드시 함께 가야 합니다.
3. 트라우마를 이해한 ‘트라우마 인폼드 케어’가 필요합니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강조되는 개념이 바로 트라우마 인폼드 케어(Trauma-informed care)입니다.
핵심은 아주 간단합니다.
“이 아이에게 무슨 문제가 있지?”가 아니라
“이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를 묻는 태도.
트라우마 인폼드 접근은 다음과 같은 원칙을 갖습니다.
- 안전(Safety) – 아이가 심리적·신체적으로 안전하다고 느끼게 하기
- 신뢰와 투명성(Trust) – 약속을 지키고, 절차를 솔직하게 설명하기
- 선택과 통제(Choice) – 아이가 이야기할지 말지, 어떤 속도로 말할지 선택할 수 있게 하기
- 강점과 회복력 강조(Strength) – “너는 잘 버텨냈다.”, “너 안에 있는 힘이 대단하다.”라고 알려주기
이 태도는 부모, 교사, 상담사, 보호시설 종사자 등 아이와 만나는 모든 어른에게 필요합니다.
4. 실제 심리 치료와 지원 방법들
가정 폭력을 경험한 아동에게 효과적인 개입 방법은 여러 연구에서 꾸준히 검증되고 있습니다.
1) 트라우마 초점 인지행동치료(TF-CBT)
- 아이가 당시 상황을 하나씩 떠올리고 정리하면서 그때의 감정, 생각, 몸 반응을 안전한 환경에서 다루도록 돕는 치료입니다.
- 아이가 “나는 약해서 아무것도 못 했다.”가 아니라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버텼다.”는 새로운 의미를 만들도록 도와줍니다.
2) 놀이·미술·모래상자 치료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아이에게는 놀이와 그림, 모래놀이가 좋은 언어가 됩니다.
- 인형놀이, 역할극, 그림을 통해 아이가 폭력 장면과 감정을 ‘바깥으로 꺼내어’ 다시 다룰 수 있게 돕습니다.
- 치료자는 “이건 뭐니?”라고 캐묻기보다, 아이가 만들어내는 이야기 안에서 감정과 의미를 함께 정리해 줍니다.
3) 비폭력 양육을 배우는 부모 상담
아이가 폭력 상황에서 벗어난 뒤에도, 부모가 여전히 감정 조절과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으면 아이의 불안은 계속됩니다.
그래서 많은 프로그램이 아이 치료 + 비가해 부모(주로 보호자)의 상담·양육 코칭을 함께 제공합니다.
부모가
- “아이 앞에서 싸우지 않기,”
- “체벌 대신 감정 코칭하기,”
- “아이에게 사과하고 회복하는 법 보여주기”
를 배우는 과정은, 아이의 회복에서 매우 중요한 보호 요인입니다.
4) 집단 프로그램의 힘
폭력을 경험한 아동을 위한 집단 프로그램도 효과가 입증되어 있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비가해 부모와 함께 참여하는 그룹 프로그램에 참여한 아이들은 불안·우울·외상 증상이 감소하고, 자기 이해와 대처 능력이 향상되는 변화를 보였습니다.
같은 경험을 한 또래들을 만나 “나만 이상한 게 아니었구나”, “나 같은 아이가 또 있구나” 라는 감각을 갖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5. 일상에서 아이를 도울 수 있는 작은 실천들
전문가가 아니어도, 부모·가족·교사가 일상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지원들이 있습니다.
1) 일상의 ‘루틴’을 회복시키기
- 규칙적인 식사, 수면, 등·하교 시간
- 숙제·놀이·휴식 시간 구분
예측 가능한 루틴은 아이에게 “세상이 완전히 엉망이 된 건 아니다.”라는 안도감을 줍니다.
2) 뉴스를 줄이고, 스크린 앞 시간을 줄이기
폭력 장면, 자극적인 콘텐츠는 이미 예민해진 아이의 신경계를 더 자극할 수 있습니다.
- 폭력적인 드라마·영상은 잠시 멀리하고
- 함께 산책하기, 간단한 놀이, 책 읽기, 그림 그리기 등
몸과 감각을 안정시키는 활동을 늘려주세요.
3) “괜찮아져야 한다”는 압박을 주지 않기
- “벌써 그 얘기야? 이제 좀 그만 생각해.”
- “이 정도 일로 왜 아직도 힘들어해?”
이런 말은 아이에게 “내가 이상하다.”라는 2차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해 주세요.
- “아직도 그때 생각이 날 수 있어. 그만큼 힘든 일이었잖아.”
- “천천히 나아가도 괜찮아. 나는 네 옆에 있을게.”
최근 전문가들도 트라우마를 겪은 아이에게 “빨리 잊어라”가 아니라 “충분한 시간과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6.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창구들
혹시 지금,
주변에 가정 폭력을 겪는 아이가 있다면 혼자 고민하지 마시고 반드시 외부 도움을 요청해 주세요.
- 긴급 상황: ☎️ 112
- 아동보호전문기관: ☎️ 1577-1391 (24시간 신고·상담)
- 여성긴급전화 1366 (가정폭력·성폭력 등 24시간 상담, 쉼터 연계)
- 지역 가정폭력 상담소·가족상담센터: 각 지자체 홈페이지, 주민센터, 보건소 등을 통해 확인 가능
우리나라에는
「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상담소·보호시설·쉼터 등 지원체계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아이와 보호자,
그리고 폭력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누구든 도움을 요청할 권리가 있습니다.
마무리
가정 폭력을 경험한 아이는
‘예민한 아이’, ‘문제아’가 아니라, 위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남은 생존자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왜 저래?”라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있었고, 지금 무엇이 필요할까?”를 함께 고민하는 것입니다.
안전을 지켜주고, 감정을 들어주고, 전문가와 연결해 주는 작은 선택들이 아이의 인생 전체를 바꿀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바로 당신이 어느 한 아이에게 “처음으로 나를 믿어 준 어른”이 될 수도 있습니다.
📌 출처
본 글은 가정폭력에 노출된 아동의 심리적 영향과 트라우마 인폼드 케어, 국내 지원체계에 관한 최신 연구와 국제 기구·정부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주요 참고: 가정폭력 노출 아동의 정신건강·신경심리적 영향에 대한 종합 연구 및 리뷰 , 아동의 폭력 노출과 스트레스 반응·트라우마 관련 브리프 , 유니세프·국제기구의 아동 폭력·정신건강 보호 가이드 , 트라우마 인폼드 케어 및 아동·가족 지원 지침 , 대한민국 가정폭력 방지 법령 및 상담·보호 체계, 아동·여성 긴급전화·상담소 안내 자료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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